맥주를 마시는 즐거움(feat 맥덕이 된 이유)
나는 전형적인 소주파였다. 맥주 이야기에 처음부터 소주파라니... 내게 맥주는 오랜 기간 맛없고 배부른 술이었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소주를 즐기는 선배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됐다. 맥주는 배부르고 밍밍한 술. 반면 소주는 자취생의 얄팍한 주머니를 배려해주는 갓성비의 술이었다. 몇만 원어치만 사서 자취방에 깔아두면 장정 몇 명은 사정없이 뻗게 만드는 술이었으니까. 학창 시절엔 그야말로 맥알못 이었다. 가끔 맥주가 먹고 싶으면 “버드는 이상한 냄새나 그래도 카스가 제일 톡 쏘고 좋지”라는 친구의 말을 맹신하고 카스만 줄곧 마셨던 맥알못.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계속 소주파였다. 직장 선배들이 얼마나 든든했겠나. 덩치 큰 놈이 소주는 잘 마시는데 뻗지는 않고 끝까지 버티며 뒷정리를 해주니... 그러다가 2008년에 도쿄에 출장을 가게 됐고 기린 맥주를 마셨다. 30년 망언을 했다가 1루에서 봉중근에게 호되게 혼난 이치로가 모델로 나오던 기린 맥주를. 기린 맥주를 마신 순간 국내 주류업계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맥주는 이렇게 맛있는 술인데 왜 그렇게 만들었나 싶어서. 물론 차후에 주세법과 생산단가 등등을 살짝 알고 난 이후엔 이해하긴 했지만... 그날 도쿄에서 마신 기린 맥주는 정말 맛있는 술이었다. 그저 톡 쏘는 청량감으로 마시던 카스와는 전혀 다른 술.
한국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소주를 버린 건 아니었다. 대략 5:5 비율로 마셨다. 안주와 사람에 따라 주종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기린 맥주가 한국에 정식 수입되며 일본 맥주 판촉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 마트에 의해서 자연스레 일본 맥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4캔 만원, 5병 만원 이런 식의 구성으로 매대를 채운 마트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퇴근 후에 프링글스와 맥주를 마시며 보는 야구는 삶의 안식처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일본 맥주가 철퇴를 맞았지만, 그 당시엔 내게 맥주를 알려준 스승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간간이 맥주를 즐기다가 완전히 맥덕이 되어버린 계기는 백수였다. 2013년 즈음 이직 타이밍을 놓치고 반백수로 짧은 일을 하면서 버티던 기간에 술을 한잔하고 싶은데 소주를 마시면 너무 서글플 것 같아서 맥주를 마셨다. 한 병 두 병 마시던 것이 끝을 모르고 늘어갔고, 종류 역시 넓어졌다. 상면발효, 하면발효 에일, 라거, 필스너 등등등 맥주에 대한 간단한 상식을 파기 시작해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 크래프트비어에 입문한 것이다. 크래프트 비어는 진짜 돌아올 수 없는 강이었다. 나에게 맥주 맛을 알려준 스승인 기린 맥주마저 잠시나마 밍밍하게 느낄 정도였으니... 크래프트비어에 입문하고 더 다양한 맥주는 마시며, 소비량이 증가해 이제는 소주를 마시는 빈도가 10%도 안 되는 완전한 맥덕이 되었다. 대략 20여 년간 맥알못에서 맥덕이 되어버린 것.
이제 맥주와는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맥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은 날은 무조건 마신다. 야구를 보면서 마시고, 드라마를 보면서 마시고, 원고를 마감하고 마시고, 마감을 못했어도 마신다. 그렇게 마시는 사이 180종의 맥주는 해치운 것 같다. 병뚜껑을 모은 것이 150개가 넘고 캔으로만 유통되는 맥주까지 합치면 대략 그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 기간 마셔왔고 앞으로도 계속 마실 예정이니 그걸 기록을 남겨보려고 티스토리를 열었다. 물로 얼마나 지속할지, 얼마나 재밌는 글을 쓸지 모르겠지만. 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알려보고 싶어서.